"북한은 현재 과도기에 진입했다. 변화의 움직임은 외식에서 엿볼 수 있다"
왜 속칭 '폴리페서'들이 유독 한국에서 판을 치는가? 한국 학계에서 국가권력은 견제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친근한 유착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미 사회 귀족이 된 소위 '명문대'의 전임교수들은 정치·행정 엘리트들과의 네트워킹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시민 자신들 또한 대숙청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반인들의 '자발적인 협조' 없이는 이 정도의 대규모 숙청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개인 간의 원한 관계를 비밀경찰에게 밀고해 해결하기도 하였음은 물론이거니와, 사실상 전 국민의 '정보원화'가 이루어진 상황이었다. 국민 누구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숙청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심리 상태는 이러했을 것이다. "내가, 혹은 내 가족이 먼저 당하느니 내가 먼저 밀고하겠다." 따라서 대숙청 시기의 사회는 "속삭이는 사회"로 정의된다.
법적으로 난민(refugees)과 이주민(migrants)은 구분해야 합니다. 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절박함', 그리고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지' 여부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난민은 여권과 비자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 인류 보편의 국제법 영역이고, 이주민은 여권과 비자를 챙겨야 하는 국내법의 문제입니다. 지금 시리아를 떠나 유럽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이 기준을 대입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절박할 뿐더러,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이주를 선택한 집단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경에서 그들을 상대로 여권과 비자 검사를 하겠다고 하기가 어색해 보입니다.
한국의 청소년에게 독서과제로 가장 많이 부과되는 작품이 『동물농장』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실로 뜻밖이었다. 과연 러시아 혁명사를 몰라도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게다가 거의 한 세기 전 러시아 역사에 어떤 학생이 관심을 가질까? 더더구나 그 땅에 공산주의가 망해버린 이 시점에 말이다. 과제를 내주는 선생은 과연 학생들에게 무엇을 기대할까? 갖가지 의문이 든다.
"차라리 친구가 재미없다고 놀렸으면 자존심 상해서 말았겠죠. 그런데 국가기관에서 잡아버리니까 나는 이게 죄가 안 된다고 증명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리트윗을 더 열심히 했죠. 그래서 괘씸죄에 걸려서 감옥에 다녀 온 거고요. 재판 받고 이제 내가 당사자니까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더 길게 하게 되고. 덕분에 국가보안법에 대해 공부까지 해버렸잖아요. 그러니까 국가보안법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고. 전 그전에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큰 관심 없었어요."